마을의 '어벤저스', 낡은 쟁기의 집을 짓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양곡리. 평소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이 작은 마을이 지난 2026년 3월 14일과 15일, 양일간 생동감 넘치는 금속음과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잠자던 마을을 깨운 건 다름 아닌 '공동체'의 힘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쉼터이자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펜션 옆 빈터에,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쓰던 낡은 농기구들을 모아둘 '옛날 농기구 전시장'을 세우기 위해 마을의 '어벤저스'가 집결했기 때문입니다.
이름하여 양곡리 '어벤저스'. 이들은 평소에는 논밭에서 흙을 만지며 묵묵히 각자의 삶을 일구는 평범한 농부이자 이웃입니다. 하지만 마을 일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낡은 작업복을 갖춰 입고 현장으로 모여듭니다. 이번 공사는 사라져가는 농촌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공터에 지붕을 올리고 전시 구조물을 세우는 대공사였습니다. 전문가를 불러도 족히 일주일은 걸릴 규모였지만, 양곡리 주민들에겐 불가능이란 없었습니다.
그 복잡한 공정의 중심에는 이장님의 리더십이 빛났습니다. 도면도 없이 머릿속에 설계도를 그린 듯, 이장님은 복잡한 작업 속에서도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주민들은 그 명쾌한 지시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마치 정밀하게 설계된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60평 지붕 아래 담긴 마을의 역사와 재능 기부
전시장이 들어설 부지의 지붕 면적은 약 60평(약 198㎡)에 달했습니다. 철골을 새로 세워 뼈대를 잡고, 그 위에 지붕재를 씌워 비바람으로부터 낡은 농기구들을 보호할 수 있는 튼튼한 집을 만드는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전시물들을 돋보이게 할 전기 배선까지 새로 깔아야 하는 고난도의 공정이 병행되었습니다. 일반적인 공사 현장이라면 수천만 원의 견적서가 날아왔을 법한 일이지만, 이번 양곡리의 공사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가치'를 일궈냈습니다.
그 비결은 주민들의 '재능 기부'였습니다. 마을 안에 숨어있던 용접 전문가, 전기 기술자, 목수들이 제 일처럼 달려들었습니다. 자본의 논리나 시장의 가격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오직 끈끈한 공동체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협동 경제'의 살아있는 현장이었습니다. 열 명 남짓한 주민들이 쏟아낸 땀방울 덕분에, 60평의 지붕은 단 이틀 만에 웅장한 위용을 갖추고 농기구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기술자의 손발이 된 잡부, 그리고 부엌의 어벤저스
농막 생활을 하며 양곡리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저 역시 이번 작업에 '잡부'라는 이름으로 동참했습니다. 전문 기술자들의 뒤편에서 무거운 자재를 나르고, 현장의 잔해를 부지런히 치우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공구를 제때 건네주는 역할이었습니다. 기술자가 높은 곳에서 아찔한 불꽃을 튀기며 용접봉을 휘두를 때, 아래에서 지지대를 단단히 받쳐주는 잡부의 조력이 없다면 공정은 순식간에 멈추고 맙니다. 잡부는 단순히 보조자가 아니라 전체 공정의 흐름을 읽는 ‘현장의 윤활유’였습니다.
하지만 현장의 열기를 지탱해 준 또 다른 주인공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점심 식사를 준비해 준 마을 부녀회 회원들입니다. 밖에서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부엌에서는 그에 못지않게 경쾌한 칼질 소리가 이어졌습니다. 부녀회 어머니들은 이른 아침부터 장을 봐오고, 솥뚜껑만 한 냄비에 정성을 가득 담아 국을 끓여냈습니다.
땀에 젖어 내려온 작업자들에게 내어준 갓 지은 밥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반찬, 그리고 직접 담근 아삭한 김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된 노동을 위로하는 따뜻한 응원이었고, 멈췄던 기운을 솟게 하는 강력한 '밥심'이었습니다. "많이들 들어요, 힘 써야지!"라며 투박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 현장의 피로는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지붕을 올린 것이 기술자의 손이었다면, 그 손에 힘을 불어넣은 것은 부녀회의 정성스러운 손맛이었습니다.
기억을 보관하는 공간, 미래를 비추는 등대
작업이 진행될수록 기술자와 잡부, 그리고 부녀회의 경계는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안전을 살피고, 힘에 부쳐 숨을 몰아쉬는 이가 있으면 말없이 다가가 어깨를 내어주었습니다. 마지막 전등이 환하게 켜지고, 새롭게 단장된 지붕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얼굴에는 피로감보다 깊은 자부심이 역력했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세우고, 내 이웃이 지어준 밥으로 힘을 내어 만든 마을의 전시장. 이것은 단순한 건축 행위를 넘어, 농촌의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가 진행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곳은 단순히 낡은 도구를 모아둔 창고가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잇고 마을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교육의 장이자 화합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양곡리가 가르쳐준 것들
양곡리에서의 뜨거웠던 이틀은 제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당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이라는 현장에서 때로는 빛나는 기술자로, 때로는 묵묵히 뒤를 받치는 잡부로, 혹은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밥을 짓는 이로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역할에 매겨진 높낮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얼마나 진실하게 마음을 모으고,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느냐는 점입니다.
농기구 전시장이라는 '기억의 집'을 짓기 위해 모였던 양곡리 어벤저스의 협동심과 부녀회의 헌신은, 각자도생의 시대에 우리가 되찾아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낡은 농기구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새 집을 마련해주었듯, 우리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공동체의 가치도 다시금 빛을 발하길 소망합니다. 오늘 당신 곁에 있는 이웃에게 따뜻한 눈인사 한 번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그 작은 연결이 모여 우리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튼튼한 지붕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