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 스파이 소설 '더파든의 스파이'(7회)

입력 : 2026.03.10 10: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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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원과 커피와 스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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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스파이 소설 '더파든의 스파이'7회. "정원과 커피와 스파이" 사진=김남수 제공

2 '더파든'의 장


'더파든'의 기록(2)


어느 누구도 그에게 직접 물어볼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의 내력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공감대를 가진 듯했다.

 

그리고 이 마을의 남자들, 한국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들 역시 아내들이 옮기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듯했다. 남자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를 대했다. 일종의 묘한 경계심이었다. 그에게 일부러 다가오지도, 먼저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그를 마주치면 목례를 하거나, "안녕하세요" 라고 짤막한 인사말을 건네는 게 전부였다. 


그에게는 편안함이었다. 어쩌면 위장된 평화. 이렇게 그는 이 작은 골짜기 마을, '진골'의 일부가 되었다. 파도가 바닷가 백사장에 스미듯이. 뻐꾸기가 멧새와 알락할미새의 둥지에 탁란의 여건을 만들 듯이. 스파이가 작전목표에 안착하듯이 말이다.


매일 아침 여섯 시면 그는 카페로 나왔다. 그리고는 무슨 의식을 행하듯이 세 잔의 커피를 만들곤 했다. 통상 원두는 하루 전에 볶아 준비하였다. 워낙 소량이기에 750그램 가정용 전기로스터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원두를 볶을 때마다 에티오피아 재래시장의 커피 세리모니를 떠올렸다. 화덕의 불을 피워 원두를 볶고, 제베나(커피를 끓이는 바닥이 둥근 도기 주전자)를 데우던 흑인 아낙. 그녀의 주름 깊은 이마에 맺혀 있던 굵은 땀방울. 뜨거운 햇볕에 고스란히 드러났던 그녀의 고단한 삶의 무게. 


그런데 왜 그 여인의 모습에서, 허민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떠올리게 되는 걸까? 


먼저 커피 두 잔을 뽑아 대장소나무(농장정원 정면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이백 년쯤 된 큰 소나무)가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가져다 놓았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몫으로. '나랏일을 이유로 자식 노릇에 소홀했다'는 회환과 사죄,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일종의 위로의식. 


그리고는 자신을 위해 진하디 진하게 커피를 내렸다. 이십 그램의 원두를 이십 초 간 이십 밀리리터의 양으로 뽑아내는 삼박자 커피. 통상 설탕을 듬뿍 넣어 농밀한 맛을 즐기는 커피, 리스트레토를 마시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추억했다. 평생 가난한 농부의 삶을 산 그의 아버지가 정작 한국식 삼박자 믹스커피 마저 그다지 즐기지 않던 사람이라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커피는 농부들의 땀냄새를 맡고 고단한 노동과 삶의 무게를 마시는 것이니까.


이렇게 그만의 아침 의식이 끝나고 십분 후면, 그의 꼬맹아내가 강아지 '슈나'를 데리고 카페로 들어서곤 했다. 오늘은 '탄자니아 더블에이'를 쓸 참이었다. 카페인에 민감한 그의 아내는 진한 커피를 두 모금 정도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는 크림치즈를 듬뿍 얹은 부드러운 빵에 살구잼을 발라 먹었다. 한 조각 반. 


그러나 커피를 꽤 즐기는 그는 먼저 크레마 한 잔을 내리고, 그것을 베이스로 에스프레소 또는 리스트레토 두 잔을 더해 진한 커피를 만든 다음, 오렌지 마멀레이드 잼을 바른 딱딱한 바게뜨 류 빵과 함께 먹는다. 두 조각 반. 이것이 그가 회사에서 벗어난 이래 육 년째 아침마다 이어져 오고 있는 그들 부부만의 '커피 세리모니'였다. 


마침 열어놓은 카페의 문 앞. 사월 초순의 이른 아침이면 늘 그렇듯 막 떠오른 태양의 빛살이 밤새 내려앉은 자욱한 골안개를 통과하면서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케냐와 탄자니아 접경 킬리만자로 산자락의 커피나무 사이에서도 이렇게 아침안개가 피어오르곤 했지. 우아한 호수 '레이크 찰라(Lake Chala)'와 위대한 호수'레이크 지페(Lake Jipe)'에서 보내오던 안개. 탄자니아의 커피나무를 키우고, 체리의 달콤함 속에 커피의 다섯 가지 맛(신맛, 쓴맛, 단맛, 짠맛, 감칠맛)을 숨겨 풍성하게 하던 안개. 그런데 이제 나는 내 고향 진골의 골짝이 만드는 안개를 보고 있어."


축축한 흙냄새에 섞여 온갖 종류의 유기물질 입자들이 새로운 생명의 신호 마냥 이제 막 흩어지기 시작하는 안개 속을 부지런히 오가며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봄이 온 거야. 이제 겨울의 게으름과는 안녕을 고해야 할 걸. 따스한 공기가, 동해에서 불어오는 습기 머금은 해풍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간밤에 동해에서 불어와 바짝 마른 그라스 속에 머물고 있던 아침바람은, 악명 높은 양간지풍(사월 또는 십일월 영동지방에 몰아치는 강력한 바람. 건조한 공기를 동반하며 종종 거대한 산불을 일으켜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 바람이 양양과 간성 일대에 분다고 양간지풍, 또는 양양과 강릉 일대에 분다고 양강지풍이라고도 한다)에 들키기라도 할까 봐 납작 몸을 낮춘 채 보송한 솜털이 덮인 램스이어의 녹색 이파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카페 출입구 앞에 벚나무의 꽃잎이 몇 조각이 날려와 있었다. 일찍 피는 꽃은 일찍 지는 것이다. 예외는 없다. 세상 일이 그렇다.


평화였다. 허민 그가 꿈꾸던, 아니 세상의 모든 스파이가 꿈꾸는 평화였다. 

최소한 그날 아침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운명의 어느 쪽 문이 열릴지, 문 앞의 어떤 길을 내가 선택하게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

 

 

 

<편집자주>

 

 

하이브리드 소설  『더파든의 스파이』는 은퇴한 스파이의 헌신에 대한 이야기다.


스파이는 대의의 깃발 아래 활동한다. 그 대의가 국가든 이념이든 정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날 대의의 깃발이 내려졌을 때 종종 스파이들은 버려진다. 때로는 제거되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총과 칼이 동원되지만 현실에서는 법이라는 도구가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대의의 깃발이 다시 올랐을 때, 스파이는 그들을 버렸던 세상의 싸움에 다시 나선다. 스파이의 숙명이다.


주인공 허민은 육십 대 초반 나이의 버려진 스파이다. 동해안의 소도시에 은거하여 정원을 가꾸며 산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대의의 깃발이 올랐다. 신물질 마약의 탄생을 막아 세상을 구해야 한다. 종래의 마약이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였다면 신물질 마약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다. 신의 영역을 건드리는 일이다.


이야기는 강릉의 조그만 농장 정원 '더파든'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힌두쿠시산맥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전 세계를 무대로 펼쳐진다.


아프가니스탄 부족장의 딸 '자흐라', 전 CIA 부국장으로 비정부기구 STC(Save the Cat)의 집행위원인 '코르맥 오로크', 태양신 '라'의 현신으로 물리학 교수이며 STC의 설립자인 '엘리아스 워드' 그리고 고양이 머리를 한 이집트 신 '바스테트'의 눈인 세상의 수많은 고양이들이 스파이의 여정에 함께 한다.



■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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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파든의 스파이'를 연재하는 김남수 작가. 사진=프로필

 

김남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미국의 조지 메이슨 대학(GMU)에서 공부했다.

육군과 국가기관에서 31년간 국가의 업무에 봉직하였다.

 

은퇴 후 기업과 금융기관에서 자문역으로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있는 대학교에 강좌를 열고 본인이 태어난 마을이 바라보이는 강의실에서 학부와 대학원생들에게 테러리즘과 범죄정보에 대해 강의하였다. 


지금은 아버지가 물려준 아담한 땅에 농장 정원 ‘더 파든’을 가꾸면서 가드닝 잡지에 정원 에세이를 기고하고 있다.


이제 하이브리드 스파이 소설을 시작한다. 이것저것 섞어 사실 같으면서 사실 아닌 이야기를 꾸미고,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이야기를 허구로 말한다.

김남수 작가 swordroa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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